사단법인 용인전승문화보존회 이사장 이인영 선생님
용인의 고인돌(支石墓)
신석기시대로부터 금석병용기시대에 이르는 시기를 거석문화시대, 또는 청동기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화가 발달하지 멋한 시대,
즉, 저급한 문화단계에 있는 종족이나 집단에 의하여 거석으로 된 석주, 문, 울타리 따위를 통칭하는 것으로 석재의 대개는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드물게는 1972년 3월 21일 경남 울주군 언양면 반곡리에서 발견된 암각화와 같은 것도 거석문화 권에 속한다. 이러한
거석문화시대, 즉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거석의 기념물로서 용인지방에는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 이외에도 여러 곳에 선돌이 전해 오고 있다.
지석묘의 하한연대를 대개 2세기경으로 잡고 있다. 이를 학명으로는 ‘돌멘’(Dollmen), 또는 탱석(撐石)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프랑스
브르따뉴 지방의 켈트어로서 돌(Doll)은 테이블이나 탁상을 뜻하고 멘(Men)은 일반적으로 암석을 의미한다. 북방식 고인돌은 4〜5개의 장방형
판석을 지상에 세워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돌인 개석(蓋石)으로 덮는다. 또 기반식이라고도 하는 남방식 고인돌은 지하에 석곽, 또는 옹관을
묻고 그 위에 5〜6개의 괴상석 도는 절석 등으로 개석을 고여 놓은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무덤에는 돌칼이나 즐문토기와 같은 부장품을
넣기도 한다. 종래의 학설에 따르자면 용인은 북한강과 남한강을 연결하는 선에서 북방식 고인돌의 남 한계점이라 하였는데 1984년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서 경기도에서는 최초로 남방식 지석묘를 발견함으로써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혼재하는 특이점이 발견되었고 이로써 용인은 남방식
고인돌의 북 한계점일 수 있다는 새로운 의미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근삼리 남방식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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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부분이 파헤쳐져 훼손된
모양 | |
▲ 1984년 발견당시의
지석묘 |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근삼리 장개마을 뒷산 언덕에 있었다. 마을에서는 칠성바위로 불려 졌는데 본래 이곳에 일곱 개의 바위가 있어서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그 중 규모가 작았던 것은 1960년대 후반 개간사업을 하면서 깨 버리거나 브르도쟈로 밀어버렸다고 한다. 현존하는 두 바위는
2000년대 중반 예아리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예부터 이곳 마을 1984년 발견당시의 지석묘 사람들이 제를 올리는 유습이 있었던 점, 마을 사람
중에 병이 나면 바위에게 빌거나 치성을 드렸다는 것으로 보아 토속 신앙물로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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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도로작업으로 나눠진
고인돌 |
남한강 상류로 유입되는 맹리의 남방식 지석묘와 연결시켜 보았을 때 이 역시 같은 위도 상 용인시의 극동지역에 해당하는 백암면 지역도
남한강 상류에 포함된 남방식 고인돌의 분포지역으로 볼 수 있다. ‘조선 고적자료’에 “백암리에 지석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니 장개마을의 지석묘를 지칭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대형 종경 314cm, 횡경254cm, 지상 높이 50cm. 소형 종경
300cm, 횡경 180cm, 두께 80cm이다.<참고 : 내 고장 용인 문화유산총람>
맹리 남방식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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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견 당시의
고인돌 |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있는 남방식 고인 돌1984년 12 월16일용문화원 향토사학회 이인영과 정양화(鄭亮和) 연구위원과 함께 발 견한
남방식(기반식) 지석묘이다. 당시까지 알려져 온 용인 지방의 지석묘는 대개 북방식(탁상식)이였으나 이 지석묘는 남방식으로 확 발견 당시의 고인돌
인되어 용인 지방에 두 개의 지석묘 형태가 혼재하고 있음이 처음 밝혀지는 자료가 되었다. 특히 이 지석묘는 개석의 머리 부분을 비롯한
가장자리에 잔 모양구멍(컵 마크), 또는 성혈(性穴)로 불러지는 구멍이 있으며 크기는 3~12㎝, 깊이 1~7㎝에 이르는 것 등 모두
27개가 있다. 이러한 모양은 용인 관내에서는 최초의 발견일 뿐 아니라 전국에 분포된 지석묘에서도 이런 유형이 흔치는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피장자의 자손을 표시한 것이거나 묻힌 시체의 수, 또는 연령 같은 것을 나타내려한 것일 수 있다는 등의 설이 있으나 아직
명확하게 규명된 학설은 없다. 그러나 종래의 학설로는 천둥 경외사상, 불씨를 만드는데 생긴 구멍 태양숭배 사상의 표현, 풍요와 다산의 상징적
의미 등의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장축은 동~서간이며 지상으로부터 30㎝의 높이를 이루고 있었으며 개석이 반으로 갈라져
20~30㎝의 틈새를 보이고 있는데, 이 마을 최용출에 의하면 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간격이 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16년이 경과한 현재에는 지반이 더욱 침식되어 반쪽이 내려앉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 자료가 1984년 12월 25일자 경인일보에 소개된
후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크 기 : 길이 3m, 폭 2.8m, 두께 0.6m
상하동 고인돌
기흥구 상하동 387번지 마을 도로변에 있다. 이 지석묘는 언제 도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전면과 후면의 면석은 훼손되고 좌우의 면석
고임돌은 덮개돌에 짓눌린 채 우측으로 쓰러져있다. 크기는 중형, 장축은 남서향이다. 역시 평저한 지대에 위치하는데 이 지역은 구흥천 상류에
인접한다. 일제의 패망을 전후한 시기까지도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지석묘가 있었다. 윗 것을 상지석(上支石), 아래의 것을 하지석(下支石)이라
호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상, 하(上 下) 지석의 두 음을 따서 상하리(上下里)라 하였다. 윗 지석은 일명 할아버지 바위라
불렀으나 도괴된 후 멸실 되었고 현재 아래지석(下支石)은 할미바위로 불려왔으며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할미지석 제를 지냈다. 제사 날에는
황소 한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제물로 바쳤고, 질병과 재액을 막아주고 풍년이 들기를 빌었다. 이러한 동제(洞祭)의 습속은 아주 오래 전부터
행하여져 왔으나 점차 간소화되다가 지금은 거의 폐하였다. 이곳으로 용인-수원 간 국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당집 안에 있었으나 새마을 사업 중
도로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철거하였고 용인-수원 간 국도 4차선 확장공사로 인하여 노면이 높아져서 지금은 도로 윗부분으로부터 약 1미터 하단으로
낮춰져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도로확장 공사 때 이전을 고려한바 있으나 현지 주민들이 현 위치 보존을 고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소재지 : 용인시
구성면 상하리 387번지
신원리 고인돌
처인구 포곡읍 신원4리 89-1번지에 있다. 모현면에서 포곡읍 방면으로 231번 도로를 타고 직진하여 박석고개를 내려오면 도로 좌측으로
양지마을이 보인다. 고인돌은 양지마을 뒤편 구만이 산의 하단부 능선 서사면 해발 90m 지점에 위치한다. 유적 서남쪽으로는 마가천이
북서-남동으로 흘러 경안천으로 유입되며 경안천이 남-북 방향으로 흐른다. 남쪽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유운리 선돌이 남서쪽 2km 가량의
지점에는 유운리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어 상호간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덮개돌의 대부분이 매몰 되어 있어 정확한 크기와 구조는
확인하기 어렵다. 고인돌은 93 x 88 x 10cm, 110 x 90 x 16cm 크기로 분리되어 있다. 고인돌의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화강암질의 개석식 고인돌이다.
유운리고인돌
처인구 포곡읍 유운1리 송골마을 이진호 소유 밭 가장자리에 있다. 이 지석묘는 기반식으로 면석이 없이 지하에 주검을 묻고 할석(割石)으로
만든 유구 위에 덮개돌을 얹은 형식이다. 장축은 서북⇢ 동남간이며 동남쪽에 지상으로부터 60cm 정도의 공간이 들어나고 있는데 당초에는 이
부분도 흙으로 덮혀 있었으나 비에 씻겨 지표가 유실되면서 하단부가 들어났고, 또 돌 밑에 뭐가 있는지 궁굼하게 여긴 사람들이 조금씩 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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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운리 고인돌(동남쪽 하단에 할석이
노출되어 있다. |
헤쳐 낸 자국이 나타나는데 바위 밑에 유구로 보이는 할석 두 개가 노출되고 있다. 1989년 용인향토사학외 회원들을 이끌고 이를 발견하여
당시 지방지에 보도된 사실이 있으나 1996년 2월 중순 서울대학교 박물관 이헌종박사 일행을 안내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했을 때 다시 한 번
지석묘 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 같은 번지에 인접한 유운리 김동환의 집 뒤곁에도 이유운리 고인돌(동남쪽 하단에 할석이 노출되어 있다. 와 같은
바위가 매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본래 이곳 주변에는 일곱 개의 바위가 있어서 예부터 이를 ‘칠성바위’라 하였으나 인가가
많이 들어서는 바람에 모두 멸실되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인 이 지석묘 만이 온전하게 남았다고 말하는데 이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신원리의
선돌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 지석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시한 용인관내
선사유적 지표조사에서도 누락되었고 용인군지 등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서울대학교 이헌종교수 등 조사팀에 의한 용인관내 매장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2007년 경기도에서 발행한 ‘경기도 고인돌’ 자료에 수록되었다. 크기 :장축 320cm. 너비 220cm. 두께
60cm.
왕산리 고인돌
경기도 문화재 기념물 제 22호.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 498번지 경안천 본류에서 0.5㎞ 동쪽에 위치한다. 평저한 지대에 자리 잡은 이
지석묘는 앞뒤로 1개씩 2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장축은 정서(正西)이다. 덮개돌(蓋石)은 길이 5.3m, 폭 2m, 두께 0.9m의
크기로서 대형에 속하며 지표면으로부터 지석 하단부까지의 높이는 1.4m이다. 장대한 개석과의 비례에 따라 석실(石室)도 꽤 큰 편이며 하중을
떠받고 있는 고인돌의 규모도 상당히 큰 편이지만 아직도 무게의 균형
을 유지하고 있는 역학구조가 신비스럽다는 느낌이다. 석실을 이루는 판석이 당초에는 4매였을 것이나 전면의 것은 결손 되었다. 또 석실
바깥쪽으로 2분지 1가량이 표토 아래에 묻혀있는데 이것은 묘실을 보호하기 위하여 평저부 보다 높게 복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여 미터 후미에
있는 지석묘 역시 대형에 속하는데 좌측을 쏠려 도괴되었다. 이 지석묘는 경기지방에서도 그 규모가 제일 큰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전
모현국민학교 교사였던 유모열은 해방 직후 광주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가 돌살촉을 발견한 바가 있다고 전한다. 1974년 10월
5일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장평리 고인돌
처인구 백암면 장평리 산11-1번지에 있다. 고인돌이 위치한 곳은 장평리 율애마을 뒤편의 구릉 정상부에 해당된다. 이 일대는 청미천
주변으로 형성된 비옥한 평야지대가 남- 북 방향으로 넓게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해발 297m의 정배산과 해발 417m의 석술암산 등, 높고 낮은
산줄기 들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북쪽으로는 율곡천이 각기 동-서 방향으로 흘러 청미천으로 유입한다. 고인돌이 위치한 능선정상부 주변은 삼국시대
토기 및 점토질 토기 등이 수습되는 유물산포지로서 유적일대에 보다 많은 청동기시대 관련 유적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의 하부는 땅속에
묻혀있어 정확한 현상은 알 수 없으나 노출된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이다. 덮개돌의 규모는 200 x 160 x 35cm 정도이며 장축방향은 동-서를
향한다. 화강암질의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되며 각 측면에는 치석한 흔적이 관찰된다. 덮개돌 상면에는 수십 개의 알 구멍이 있다.<참고 :
용인의 역사와 문화유적>
전대리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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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리 |
이 고인돌은 개석식으로 신원리의 제방공사 때 마을회관 뒤편으로 이동되었다가 다시 원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곳에는 모두 2기의 고인돌이
있다. 1호 고인돌은 현재 에버랜드의 진입로 변으로 옮겼다. 덮개돌의 평면 형태는 원형에 가까우며 규모는 252 X 223 X 27cm이다.
상면에는 지름 5~9cm, 깊이 1~3cm의 알 구멍 7개가 확인되고 있다. 2호 고인돌 역시 하천변 평탄지로 이동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220 X 195 X 32cm이다.
주북리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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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북리
고인돌 |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 49호. 청동기시대. 세로 2.8m, 가로 2.5m, 두께 0.5m.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825번지에 있다. 이
지석묘는 경안천 상류에 위치하며 대대천과 주북천 사이의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주북리 임원 마을 백산원 농장 경역에 있으며 장축은
동북→서 주북리 고인돌 남간이다. 왕산리 고인돌보다는 휠 씬 작은 규모이지만 북방식 고인돌로서 완벽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관내에서는
왕산리 것과 이곳의 고인돌뿐이다. 석실의 판석은 3매로 되어있고 전면의 1석은 훼손되었다. 지석의 높이는 지상 1m 정동이며 이 지석의 앞쪽에
있었던 1기의 지석은 이미 오래 전에 파괴도어 땅에 묻혔거나 노출되어 있는데 앞쪽의 것이 훨신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