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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KTX에서 만났던 사람

글쓴이 배 은 선(철도박물관)

 [경기시사투데이]

배은선 철도박물관장

고속철도와의 만남

2003년 어느 여름날, 역으로 전화가 왔다. 그 때 나는 초임 역장으로 팔당역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의 팔당역은 지금처럼 전철역이 아니라 충북 단양에서 생산된 시멘트를 받아다가 수도권 동부지역에 공급해주는 화물 취급역이었다. 전화하신 이는 지방청 영업국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님이었는데, 본청에서 함께 근무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대전에 내려갈 형편이 안 된다고 말씀드리니 근무처가 대전이 아니라 서울의 고속철도본부 고속철도개통홍보팀이라고 하셨다. 학생시절부터 문예반 활동을 열심히 했고 사진촬영에도 진심이었던 터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가을이 시작될 즈음 고속철도개통홍보팀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것이 12년 넘도록 이어진 홍보업무의 시작이었다.

어느 사랑꾼과의 만남

고속철도가 개통되고 철도청이 한국철도공사로 전환된 후, 광명에서 대전으로 출퇴근을 하게 됐다. 그런데 출근시간이 일정하다 보니 역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매일 노란색 접이식 자전거를 끌고 KTX를 타는 젊은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의 존재를 눈에 익힐 무렵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코레일 홍보실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자전거를 끌고 매일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자신은 유성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다니는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신혼 보금자리는 목동에 있고, 처음엔 직장 근처인 대전에 방을 얻어 주말부부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맞벌이 아내가 아기를 갖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아내를 가까이에서 돕기 위해 이 사랑꾼은 출퇴근을 결심한 것이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출퇴근은 물론 KTX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KTX 정기권을 끊고, 목동의 집과 광명역, 대전역과 직장은 자전거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의 하루 일정을 이랬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일을 좀 하다가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가방에 챙겨 자전거로 광명역에 도착한다. 자전거를 접어 들고 KTX에 오르면 대전으로 이동하는 40분이 아침식사 시간이다. 운이 좋으면 통로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 대전역에 도착하면 자전거를 다시 펴서 서광장을 통해 유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먼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업무를 시작한다고 했다. 퇴근할 때엔 그 역순이다. 그러니까 눈이나 비가 쏟아지는 악천후 상황만 아니라면 그의 자전거 출퇴근을 방해할 훼방꾼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광명에서 대전까지의 KTX 정기권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두 집 살림보다 통근이 훨씬 저렴하고 가정의 평화와 개인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 젊은 고객의 지론이었다.

그 후에도 출근길에 마주칠 때면 가볍게 인사는 나누곤 했는데, 내가 서울사무실 근무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벌써 15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니, 뱃속의 아기도 지금쯤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렇게 KTX는 개통 20년 동안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시간의 가치를 인식시켜 주었고, 물리적 거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도 가끔 광명역에 가면 그의 선한 눈매와 노란색 접이식 자전거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