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용인전승문화보존회 이사장 이인영 선생님
간돌·검(磨製石劍) 서양에서는 외날의 칼을 나이프(Knife)라 한다. 이는 생활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듯하며, 양날의 것을
검(Dagger)라고 하는데 이는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뜻한다. 간돌 검의 경우는 모두 양날로 된 것으로 보아 이를 일상의 생활용품 이라고
하기보다는 무장용이거나 의기적(儀器的)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초기의 것들이 실용적인 기능으로 제작된 것에 반하여 늦은
시기의 것일수록 과장된 형태를 보이고 있고, 주로 고인돌이나 돌무덤에서 출토되고 있어 장송용이거나 의기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검의 형태에 따라 일단, 또는 이단 유병식(有柄式) 등으로 호칭된다. 특히 손잡이 중간에 홈을 판 것은 의장용 패검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 용인 향토사료관에는 청동기시대의 간돌 검이 전시되어 있는데 용인 관내에서도 이런 유형의 간돌 검이 출토된바 있어 청동기시대
원시 집단이 여러 곳에 분포되어 생활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는데 주로 경안천, 진위천, 탄천유역에서 발견되었다.
<남동(南洞)간돌검> 출토지는 산을 등진 평지라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의 변전소 근처인 것으로 생각된다.
가락바퀴 1점과 함께 출토되었다. 출토지 : 용인시 처인구 남동
옥현마을 출토년도 : 1965년 재 질 : 혈암(頁岩) 형 식 : 이단유병식 크 기 : 병부(자루) 폭 6.8, 두께
1.1㎝
<덕성리 간돌검> 이 간돌검은 1965년 7월 덕성리 마을 뒷산에서 발견
된 것으로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난 지역에서 이 마을 거주 소진하가 발견
신고하여 당시 2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좌우로 돌출된 검코와 칼끝이 파손되었다. 출토지 : 용인시 이동면 덕성리(뒷산) 출토연도:
1965년 7월. 재질 : 혈암(頁岩) 형식 : 일단유병식. 크기 : 길이 21.5㎝, 몸통폭 4.3㎝, 몸통두께 1.1㎝, 자루폭 4.1㎝,
자루두께 1.2㎝
<송전리반달돌칼(半月形石刀)> 청동기시대, 길이 11.3㎝ 너비 4㎝ 두께 0.4㎝. 이 반달돌칼은 1993년 8월경 이동면
송전리 거주 조희태가 발견 소지하고 있다가 용인 축협 유한무가 구입하여 농협 용인시지부 농구 전시실에 기증했던 유물이다. 당시 필자가 용인시
향토 사료관을 준비하던 중 위의 사실을 알고
농협측으로 부터 위탁받았고 현재 향토사료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이 유물은
점판암이며 일부가 결손 되었고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을 접합시킨 것이다. 돌칼이나 돌도끼는 수렵과 무장 수단에 이용된 남성적인 용기(用器)라
한다면 반월형돌칼은 여성적인 용구로 보여 진다. 대개 반달형의 납작 한 돌의 단면을 갈아 날을 세우고 가장자리에 두 개의 구명을 뚫고 끈을
달아서 사용하였는데 주로 곡물의 이삭을 따는데 사용된 적수용(適穗用)이다. 이는 청동기시대에 주로 출토되며 반달형 외에 장방형, 삼각형도 있으나
이의 범주에 속한다. 1965년 5월경 용인시 남동 옥현 마을에서도 2점의 반달돌칼이 발견된 바 있는데 길이는 모두 13㎝ 정도이며 폭은 각각
5㎝, 4㎝ 정도이다. 이중 1점은 장방형이고 1점은 반월형인데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운리간돌검> 1981년 12월 중순 당시 용인읍 마평리 653번지 김기섭이 포곡면 유윤리 자기 소유 전지에
서 발견 신고하여 5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병부(자루)와 검신(날)의 길이가
거의 같은 크기이며 돌의 맥이 겉으로 노출된 혈암(頁岩)이다. 일단유병식이며, 길이 21.7㎝, 몸통폭 4.4㎝, 몸통두께 0.8㎝, 자루폭
7.9㎝, 자루두께 1.1㎝이다.
<창리간돌검> 처인구 남사면 창리. 1969년 9월 출토, 유문암(流文岩), 이
단 유병식,출토 경위는 상세치 않다. 검은 끝이 뾰족하고 몸통 부분이 넓은 긴
삼각 꼴이며 자루는 상하가 넓고 가운데가 좁은 모양이며 가운데에 홈 선이 파져있다. 검 전면에 평행의 빗금무늬가 있으며 칼날은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중앙 부분이 절단되었다. 크 기 :전체길이 33㎝, 몸통(검신)폭 6.5㎝, 몸통두께 0.8㎝, 자루폭 6.3㎝, 자루두께
1.0㎝)
간 돌도끼(磨製石槍) 칼이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 물건을 자르고 찌르거나 또는 방어,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과 같이 돌도끼는 나무를
자르고 쪼개는 것 이외에도 사냥을 하거나 무장 수단으로 활용했을 것이라는 여러 가지 징후를 가지고 있다. 돌도끼는 돌칼의 제작보다는 부재선택이나
재질의 연마에 있어서 특별한 기술이나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았을 것임으로 여타 석기류 보다 출토되는 양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 석기의 용도에 따라 도끼나 자귀류는 화강암이나 섬록암(閃錄岩)을 칼, 창,
살촉 등에는 점판암이나 혈암(頁岩) 계통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간석기류는 철기가 보편화하는 기원 전 후까지 계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용인
관내에서는 1970년도 포곡초등학교 학생들이 전대리 마을 앞 하천 부근에서 간 돌도끼 1점을 주어다가 학교 향토관에 진열했던 일이 있었으나 본
품은 사료관 유물을 수집할 때 전 시립도서관장 정해영이 기증한 것으로 재질은 규석이 많이 섞인 설록암이다. 출토지 :
용인지역(위) 시 대 : 청동기시대 소장처 : 용인향토사료관 기증자 : 정해영(도서관장. 위) 크 기 : 길이 14.2,
너비 7.1, 두께 4.3㎝
<보정동석기(반타반마·돌도끼류 일괄유물)>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968년도부터라는 것이고
1981년 10월 25일부터 7월 7일까지 연천군 전곡리, 여주군 흔암리 강원도 양양 등지에서 구석기시대 유물 145점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종래
일본 사람들의 한반도 구석기시대 부재 설은 억지였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용인지방에도 구석기시대가 존재하였는가? 이 문제는 전장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이젠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이 방면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필자를 흥분케 한 일이 있다. 1981년 7월 16일 구성면 상하리 거주
송영만이 그의 부친 장례를 위해 땅을 파던 중 찌르개, 격지, 반타반마 돌도끼 등 5점에 이르는 일괄 유물이 출토 된 것으로 용인 지방에서 타제
석기가 수습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이러한 유물들은 신석기를 전후한 것으로 밝혀져, 그동안 선사유물로 본 용인지방의 인류문명의 족적은
구석기로부터 신석기시대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보정동 석기① 타제석기, 일괄유물 중 가장 큰 석기로 재질은 요석이다. 간접떼기로 둔중하지만 3분지2가량의 하단에 날이 서있어 자르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출토 중 3등분으로 파손되어 앞쪽이 넓고 손잡이 부분(뒷쪽)이 좁다 길이는 358.5cm, 너비
8.2cm이다.
보정동 석기② 일괄유물 중 이 타제석기는 삼각의 배면을 보이고 있으며 끝이
뵤족하고 예리하여 찌르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격지떼기로 된 이석기는 점판암 계통으로 검은 색을 띠고 있다. 수식상태가 심하여 출토 중
두 동강으로 파손되었다. 길이 27cm, 너비 5cm.
보정동 석기③ 보정이 일괄석기 중 석도로 보이는 이 유물은 혈암계통의 재질이며
삼각형의 배면을 형성하는데 타격을 가하여 격지떼기를 한 하현(아래부분)에 날이 서 있어서 자르는데 사용된 석기로 보인다. 길이 20.5cm,
폭은 5.3cm이다.
보정동석기④ 장방형인 이 석기는 혈암계통의 석질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석기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타원형 꼴이다. 부식상태가 심하여 출토될 때 일곱 토막으로 파손되었으나 본래의 생긴 모양에 약간 인공적인 힘을 가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는 반타반마의 돌도끼류로 보이는데 도면의 우측은 모서리를 문질러서 완만한 곡선을 보이고 있으나 좌측은 적당히 두두려 낸
모양이다. 크기는 길이 25cm, 너비 7cm, 두께 5.5cm이다.
보정동석기⑤ 간 돌도끼로 양면을 갈아 조갯날로 만든 석
기이다. 몸돌은 자연석 그대로이고 한족 끝을 갈아 날을 세웠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뒷부분에는 타격에 의하여 일부가 파손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와 같은 간 돌도끼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임으로 타제석기와 혼재
반출되어 이 유물들은 후기 신석기로부터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길이 18cm, 너비 6cm, 두께는 4cm이다.
<정수리 간돌 끌(石鑿)>1975년 양지면 정수리에서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재질은 혈암이다. 크기는 길이 16.3,
너비 3.5cm이다. 양지면 정수리에 거주하는 고병훈이 아궁이를 고치려고 땅을 파던 중 출토되었다고 한다. 장방형의 자연석 한 쪽을 갈아
조갯날을 만든 것으로 출토지역은 경안천 지류인 대대천 원류지에 속하며 곤지암천의 발원지로 지형 상 매우 높은 지역에 속하는데 이미 그 시기에도
원시인들이 용인 관내의 여러 곳에 살았다는 족적 이였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간돌창(磨製石槍) 간 돌창 역시 양날의 것이 통식이다. 사람이나 짐승을
찌르는데 사용된 끝이 뾰족하고 긴 무기로 자루에 꽂거나 끼워서 사용할 수 있도록 슴베가 있다.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 창 역시
실용적인 형태를 지나 의기(儀器), 또는 부장용(副葬用)으로 제작된 것으로 고인돌이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소장처 : 용인시
향토사료관 시 대 : 청동기시대 크 기 : 길이 23, 너비 4.84, 두께 1.17㎝, 슴베길이 3㎝ 재 질 :
흑요석 출토지 : 미상
<간 돌살촉(石鏃)> 돌살촉 역시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고인돌이나 돌무지무덤에서 출토된다. 1943년경 유모열 이라는 사람이
모현면 왕산리 498번지 고인돌의 석실에서 돌살촉을 발견한바 있다는 기록이 있었고 4․19 혁명전 용동중학교 자료실에도 관내에서 발견된 돌살촉이
있었다고 전한다. 1965년 남리 옥현에서 발견된 독살 촉은 혈암의 재질이며 슴베가 있는 삼각형의 모양으로 길이는 6.4㎝ 폭 1.7㎝ 몸통두께
0.4㎝ 슴베두께 0.5㎝이며 1985년 9월 21일 원삼면 두창리 황토재 마을에서 동 마을 거주 김명국이 돌살촉을 발견
한 바 있다. 그 외에도 1960대 초 용인시 마평동 돌무지무덤에서 용인신협
상무 남경조가 10여 개의 돌살촉을 주어다가 선생님에게 드린 사실이 있다는 증언도 있다. 돌살촉의 형태는 끌이 둥근 것, 납짝한 것, 뾰죽한
것이 있고 모양에 따라 삼각형, 검신형(劍身形), 유엽형(柳葉形)등으로 분류되는데 삼각형이 유엽형 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검신형은 용인 향토사료관 소장의 돌살촉(길이 12.4 너비 1.28 두께 0.7㎝)이 있는데 이의 출처는 확실치 않으나 마평동 돌무지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돌살촉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유형은 쇠촉(鐵鏃)으로 발달해 가는 모체가 되며 사냥이나 무장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재료는 주로 돌칼이나 돌창 등을 만들 때 사용되는 점판암 계통의 돌이 많다.<참고 : 내 고장 용인 문화유산총람> |